📘 1993년 12월 16일 (목) / 날씨: 눈
아침부터 온누리에 흰눈이 내린 날 — 마음이 뒤숭생숭했던 하루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하얗게 쌓이는 눈을 보며 괜히 마음도 들떠 있었고,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도 뒤섞인 하루였다.
1, 2교시에는 상하수도 과목 수업이 있었고,
3, 4교시엔 인하대 토목공학과 양창현 교수님께서 <교량공사와 안전시공>에 대해 강의해 주셨다.
양창현 교수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MIT 등 명문대학원을 거쳐
30여 년간 강단에서 구조를 가르쳐 온 원로셨다.
(훗날, 나의 첫 직장에서 만난 내 사수 서수원 형님이 바로 이 교수님의 수제자였고,
『구조역학, 양창현 저』 책은 지금도 구조기술사 준비생들의 필독서다.)
오늘 강의에서는 토목공학을 구조, 지반, 수공 등 세부 분야로 나누어
각 분야의 전망을 소개하며, 특히 교량과 구조안전성에 대한
감리요원의 책임과 경각심을 강조하셨다.
강의 중 창밖에 눈보라가 휘몰아치자, 순간 강의실 안도 술렁였다.
교수님은 창밖을 함께 바라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젊은 여러분은 눈이 오면 낭만을 느끼겠지만,
나는 60이 넘으니 교통 걱정이 먼저입니다.
그래도 젊은 시절의 꿈과 낭만을 가진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그 말씀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눈 속에서도 우리는 청춘이고, 배움의 한복판에 있었다.
6, 7교시는 제안ENG 전무이사이자 감리 실무의 선배이신 이영구 강사님의
<건설공사 감리요령> 강의였다.
그는 감리 제도가 입법화되기 전부터 줄곧 현장에서 감리 업무를 수행해 온 베테랑이었다.
실제 사례와 현실적인 조언이 가득 담긴 강의였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감리원은 건설공사의 꽃입니다.
시공을 모르는 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8교시엔 <신행주대교 붕괴원인 분석> VTR을 시청했다.
이 영상은 교육원에서 자체 제작한 자료로,
붕괴 당시의 상황과 기술적 분석이 명쾌하게 정리돼 있어,
참사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끼게 해줬다.
저녁 특강은 KBS 해설위원 김찬식 선생님의 강연.
현직 언론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대 변화와 언어, 사회 흐름에 대한 통찰은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달콤한 흰눈과 달리, 마냥 기쁘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
며칠 전 음주소란을 일으켰던 교육생 한 명이 결국 퇴교 조치를 받았고,
장기 결석자 한 명도 함께 퇴교되었다.
건축반에서는 다섯 명이 감점 처분을 받았으며,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교육원의 교학처장이 교체됐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하루가 다르게 교육 분위기가 긴장되고 있다.
한편, 정치권에서는 황인성 국무총리가 경질되고,
이회창 전 감사원장이 신임 국무총리로 지명되었으며
곧 개각도 단행된다고 한다.
우리 동기들은 유일한 정신적 후원자였던 고병우 건설부장관이
개각에서 제외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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